일천년래 대사건(一千年來大事件) 묘청의 난

Posted by 밥쏬
2019. 6. 24. 15:06 고려

이자겸의 난 이후 고려는 가뭄과 천재지변 등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후 인종은 처참히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며 1127년 (인종 5년) 2월 서경에 행차하여 유신지교를 반포하기 된다.

“짐이 천지의 커다란 명을 받아 조종(祖宗)이 남기신 기업을 이어받아, 삼한의 왕이 된 지 이제 6년이 되었다. 일을 처리할 지혜가 없고 사리를 감별할 만한 안목이 없어 재변이 서로 잇따라 조금도 편안한 해가 없었다. 작년 2월에 난신 적자(*이자겸)가 이 틈을 타서 일어났다가 음모가 발각되어 짐은 어쩔 수 없이 모두 법으로 다스렸다. 이로부터 허물을 반성하고 내 몸을 자책하니 부끄러운 일이 많았다. 이제 일관(日官)의 건의에 따라 서도(西都)에 행차하여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르침[維新之敎]이 있기를 기대하며 중앙과 지방에 포고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려 한다.”               『고려사절요』 권 9 인종 5년 3월 조

인종의 서경행차 당시 묘청, 백수한등의 서경파는 인조에게 서경중심의 정치를 요구한다.
이당시에는 풍수지리설이 유행했었고 불교중심사회에서 묘청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묘청은 이자겸의 난등 계속되는 귀족들의 횡포에 개경에서의 고려는 수명이 다했다고 판단했으며 인종에게 대화궁을 지으면 금이 알아서 조공을 할 것이라는 등으로 인종을 설득했다.
인종은 묘청의 꼬드김에 어느정도 따르기로 하여 서경에 대화궁을 지었지만 길하기는 커녕 오히려 나쁜 일만 계속 일어났다.

상황이 안좋게 돌아가자 묘청은 조광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수도를 서경으로 하며 나라이름을 대위로 해서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
이에 김부식은 서경을 토벌하게 되었고  서경을 포위하여 몰아넣었다. 수세에 몰린 반란군은 묘청의 목을 베어 김부식에게 바쳤으나 김부식은 오히려 그들을 하옥시켰다. 항복해도 안되고 반란도 성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조광은 다시 싸우기로 결정하고 묘청의 난은 1136년 완전히 진압되게 된다.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일천년래 대사건이라고 표현하며 매우 중요하게 평가했다.
묘청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권력은 완벽하게 개경의 문벌귀족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 사건 자체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나 신채호는 묘청에 대해 광망하다는 표현을 하며 좋지 않은 평을 하고 있다.
즉 상황이 안좋게 돌아가니 묘청이 미쳐 날뛴것 같다는 말이다.
이 난이 잘 준비되어 성공적이었다면 문벌귀족의 권력독점도 없었을 것이고 조선의 독립 사상이 패망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