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릉비의 임나일본부설
광개토대왕릉비는 장수왕이 왕좌에 오른후 다음해에 광개토대왕을 기리기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중국 길림성 통구에 위치해 있는데
통구는 과거 고구려의 수도였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4면 모두에 글이 새겨져 있는 사면석비 입니다.
또한 크기도 거대한데 6미터에 이르는 높이에 37톤의 무게를 가졌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의 후계자격인 발해가 멸망하고는 잊혀진 존재였습니다.
청나라 시대인 1880년에 다시 발견된것이죠.
일본에 의해 광개토대왕릉비는 왜곡되어 해석됐습니다.
1883년 사카와 규빈이라는 첩자가 참모본부에 탁본을 가져다 주고 해독을 시작했습니다.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야마토정권이 4세기 한반도 남부에 진출하여 6세기까지 가야,신라,백제를
지배했고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를 근거로 우기고있습니다.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내용인데 글자가 비어있어 제멋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학자 정인보 선생은 일본의 주장에 반박하며 왜가 백제와 신라를 도우려 왔다가 고구려가
그들을 공격해 신민으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또한 일본은 광개토대왕릉비를 일부러 회손하고 시멘트를 발라서 글자를 고쳤다는 의혹을 받고있습니다.
비문변조설이라고 하는데 중국이 했다 일본이 했다 말이 많습니다.
어찌됐든 일본은 그 시기 백제와 사이가 좋았었고 백제를 공격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백제와의 관계는 극에 치달았던 상태라 백잔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었습니다.
백잔은 잔인하고 사납다는 뜻으로 백제를 경멸하고 있는 고구려가 백제에 대해 나쁘게 쓰기위해
백제가 왜에게 침략당해서 먹혔다는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 비석의 글자에 신경 써서 해석하는 것은 숲을 보지않고 나무가지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정확한 해석을 하기위해서는 그 시대의 대외관계를 파악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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